아르키메데스 천문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87년 무렵 시라쿠사에서 태어났다. 시칠리아에 있는 도시인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날 무렵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자치 식민지였다. 아르키메데스의 출생 연도는 비잔틴 그리스의 역사가 존 체체스의 연표에 기초한 것이다. 체체스는 아르키메데스 사망 당시 나이가 75세라는 기록을 근거로 그의 출생년도를 산정하였다.[4] 아르키메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출생지와 죽음 이외에 알려진 사실이 그리 많지 않다. 발견의 기쁨에 벌거벗고 거리를 달렸다는 것 같은 아르키메데스와 관련한 많은 일화는 후대에 각색된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스스로를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여겼고 특히 구에 대한 자신의 발견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모래알을 세는 사람》에서 아버지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였는데, 이름이 피디아스라는 것과 천문학자라는 점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의 국왕 히에론 2세와 친척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다른 기록으로는 아르키메데스의 친구였던 헤라클레이데스가 쓴 전기가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이 때문에 아르키메데스가 결혼은 했는지, 아이가 있었는지와 같은 것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알려진 것으로는 아르키메데스가 청년기에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에서 공부하였다는 것과, 사모스의 코논, 에라토스테네스와 같은 사람들과 동시대에 살았다는 것 정도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도시데우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는 옛 친구였던 코논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친구이자 평소 존경했던 한 수학자를 잃었다는 슬픔에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지금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연구된 적이 없고 마침내 저에 의해 완성된 한 정리를 코논에게 보낼 작정이었는데 이제 보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군요.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12년 무렵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기원전 212년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2년 동안의 공방전 끝에 시라쿠사를 점령하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도시가 함락될 당시 아르키메데스는 기하학 문제를 놓고 고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시라쿠사가 함락되자 로마 군인이 아르키메데스에게 찾아와 마르켈루스를 접견하라고 명령하였다. 아르키메데스가 문제를 푸는 도중이라며 거절하자 이에 격분한 군인이 아르키메데스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고 한다. 플루타코스는 이 외에도 아르키메데스의 사망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아르키메데스가 도시 함락 와중에 사망한 것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아르키메데스가 들고 있던 해시계, 구와 같은 도구가 보물로 오인되어 이를 약탈하려는 병사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마르켈루스 장군은 도시를 함락시키면서 부하들에게 아르키메데스의 안전을 당부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망 소식에 매우 화를 냈다고 한다.
한편, 아르키메데스가 남긴 말로 유명한 “내 원을 밟지마” (그리스어: μὴ μου τοὺς κύκλους τάραττε, 라틴어: Noli turbare circulos meos)는 후대에 누군가가 지어낸 것으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8] 폴리비오스는 《세계 역사》에서 시라쿠사 공방전과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언급하였다. 플루타르코스와 티투스 리비우스의 저서를 바탕으로 폴리비우스는 아르키메데스가 도시 방어를 위해 여러 가지 기계를 제작한 기술자였다고 적고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사망한 지 137년이 지난 기원전 75년 키케로는 시라쿠사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키케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사방으로 찾아다닌 끝에 시라쿠사 인근의 관목 사이에 버려져있던 묘비를 발견하였다. 키케로는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에는 원기둥과 구가 그려져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이 찾은 묘가 아르키메데스의 것이라 확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