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코 브라헤의 관측
튀코의 관측 업적
튀코 브라헤의 천문학에 대한 관심은 1560년 8월 21일, 코펜하겐에서 일어난 일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튀코 브라헤는 천문학자들이 달의 궤도를 적은 관측표를 통해 일식같은 현상을 예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 이후에 튀코는 관측표들에 관하여 더욱 자세히 알아보았지만, 그가 점점 더 천문학에 빠져들수록 관측표들의 오류가 조금씩 더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튀코는 이러한 점을 못마땅해 하였고 그는 오류들을 고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천문을 관측하기로 결심하였다.[20] 그는 라이프니치 대학교에서 아버지의 바램과는 반대로 천문관측에 힘을 쏟았고, 별점에도 관심을 보였다. 라이프니치 대학을 떠난 후 그는 1570년에 덴마크로 돌아와서 헬싱보리 성에서 관측을 계속 하였다. 이후에 그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De Nova Stella를 출판하였다.
1576년, 유명한 천문학자 튀코를 자신의 나라에 계속 두기 위하여 프레데리크 왕은 코펜하겐과 엘시노어 사이의 해협에 있는 작은 섬 벤(Hven)을 튀코에게 주었다. 그 해 2월 22일 튀코는 화성과 달의 합을 관찰하고, 그 이후 튀코는 자신의 천문관측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1579년 에는 벤 섬에 위치한 자신의 천문대를 우라니보르그(Uraniborg)라고 지었으며, 현재 이 천문대는 중요한 과학시설이 되었다. 그 섬에서 튀코는 별자리들을 중심으로 태양, 화성, 목성, 토성 등의 궤도를 관측하였지만, 수십년이 지나도 그의 관측에는 별다른 발전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1577년 그가 밝은 혜성을 발견함으로써 천문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1588년 튀코를 매우 아끼던 프레데리크 2세의 죽음이 튀코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였다. 후계자 크리스티안이 국왕이 된 이후, 튀코의 지위는 낮아졌지만 튀코는 자신의 제자인 케플러와의 인연을 맺으면서 이 시대에서 가장 정확하고 자세한 천문학적 관측자료였던 튀코의 관측결과는 후에 케플러에게 모두 넘어갔다.
관측 결과의 정확성
튀코가 관측한 별과 행성 궤도 등 여러 결과들은 양도 많을 뿐더러 모든 자료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튀코의 별 관측 목록 D에 관하여 Rawlins는 이전의 어떠한 천문학자들보다 튀코는 관측방법, 기구, 계산 등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난 관측을 했다고 하였다. 그는 수년간에 걸쳐서 정확한 관측을 계속하면서 정확성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극한까지 이르렀고, 망원경을 사용하지 않은 관측으로는 가장 정밀하였다고 한다. 그의 정확성을 살펴본다면 그가 작성한 항성목록의 표준성좌표의 오차는 불과 25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오랜시간을 별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바쳐 항성목록을 출판했는데 그 목록에는 777개 항성의 정확한 위치를 측정했으며 나중에는 1000개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달궤도의 각 지점의 위치를 정기적으로 측정하여 달 운동이론을 발전시키고 달궤도 귀착점의 속도를 측정하였다. 이후 천문학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 튀코 브라헤의 행성관측이었다. 당시의 정밀하지 못한 관측기구를 이용하여 가까운 항성의 이각을 측정해내었다. 벤 섬에서 연구하던 시절에 그는 항상 자신이 만든 사분의와 혼천의를 사용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에 의해 결국 수치화된 행성이론을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케플러에 의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