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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문학

 

학문과 성직
1503년 가을, 바르미아로 돌아온 코페르니쿠스는 참사회 위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교회 소유 재산의 관리 감독, 로클로우 교회 학교의 수업 진행 감독 등의 일을 맡았다. 또한, 그는 외삼촌인 바첸로데 대주교의 비서, 주치의로 일하면서 그에 해당하는 수당도 받을 수 있었다. 이 업무를 위해 그는 대주교의 공관인 리츠바르크 성에 머물렀다. 그는 여가 시간에 그리스어를 독학하며 이를 위해 그리스어로 쓰인 몇몇 편지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은 코페르니쿠스가 1509년에 번역한 테오필락투스의 <도덕, 시골뜨기, 사랑꾼의 편지들>이다.

그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천문학을 놓지 않았다. 그는 1504년에 행성들이 게자리에서 하나로 만나는 대화합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기존의 천문학 표와 비교해 본 결과 그는 몇몇 차이를 발견했다. 레기오몬타누스의 <알마게스트의 발췌본> 또한 계속 공부하고 있었는데 레기오몬타누스의 몇몇 해석은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펼치는데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분석과 계산을 통해서 자신의 태양중심설을 발전시켜갔다. 1510년, 코페르니쿠스는 바첸로데 대주교의 비서직을 그만두고 프롬보르크의 가톨릭 참사회 위원으로만 일하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에는 천문학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그 때까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새로운 행성의 배열을 커다란 여섯 장의 종이 위에 옮겼다. 이것이 바로 <짧은 해설서>이며 코페르니쿠스는 이것의 필사본을 자신의 몇몇 친구들에게 돌렸다. 그는 이 얇은 책에서 등속 중심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 태양 중심 우주론을 제시했다.

틈틈이 천문학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코페르니쿠스는 성실하게 참사원의 임무를 다했다. 1511년부터 1513년까지 그는 참사회의 고문으로서 참사회 업무 수행에 필요한 서류와 문서들을 작성하고 재정 거래를 관리했다. 1512년, 루카스 바첸로데가 죽고 코페르니쿠스의 볼로냐 대학 동료였던 파비안 루찬스키가 그 뒤를 이어 대주교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동프로이센의 프라우엔부르크로 옮겨가서 성당 참사회원으로 일했다. 참사회원은 성당의 미사를 계획하고 건물을 관리하는 직책이므로 그다지 일이 많지 않아 남는 시간에 천문학을 연구했다. 1516년에 코페르니쿠스는 바르미아 참사회의 영토를 관리할 임무를 맡아 소작농 문제를 해결하고 1517년에는 화폐 개혁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1520년, 계속해서 바르미아에 대한 약탈 행위를 벌여오던 게르만 기사단이 프롬보르크를 공격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국왕과 동료 위원들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등 프롬보르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프롬보르크는 함락되지 않았다. 1522년, 코페르니쿠스는 왕립 프로이센 의회의 회의에 참석해 은전 주조 개혁에 대해 논의했다. 1523년, 파비안 루찬스키 대주교가 사망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다음 대주교가 선출될 때까지 참사회 위원들에 의해 임시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1525년, 폴란드와 게르만 기사단은 최종 평화안에 서명했다. 그 무렵 일어난 루터의 종교 개혁은 바르미아에도 영향을 끼쳤다

천문학적 활동기
경력이 높은 회원이 되어 할 일이 감독과 조언 등으로 줄어들면서 1530년대,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1529년 그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을 완전히 개정하려고 하였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런 계획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출판을 권유했다. 1533년에는 교황의 비서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교황과 추기경들에게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이론을 들은 쇤베르크 추기경은 그의 업적을 치하하며 자신에게 그의 이론을 알려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결국 1542년, 계속된 교정 끝에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원래 이 책의 제목을 <회전>이라 칭하려 했지만 인쇄소에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로 바꾸어 출판했다. 책은 출판되었지만, 그 해 코페르니쿠스는 뇌출혈을 겪었다. 그 후 그는 몸의 오른쪽 부분이 마비되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문학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에우독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중심설을 주장했다. 에우독소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여러 층의 천구가 겹쳐진 모습의 우주를 상상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달을 기준으로 지상계와 천상계를 명명하였다.

태양중심체계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기원전 3세기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310?~230B.C.)이다. 그는 저서 『태양 및 달의 크기와 거리에 대해서』에서 태양은 지구에 비해 6~7배 더 넓고 그 크기는 지구의 300배에 달한다고 서술하였다. 그는 태양이 지구보다 크기 때문에 태양의 연주운동은 지구의 공전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항성의 일주운동은 지구의 자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중심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는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별의 시차에 의한 효과를 관측할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아폴로니우스와 기원전 2세기의 히파르코스는 행성이 단순히 원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 위에 있는 작은 원 위를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원을 주전원, 큰 원을 대원이라고 부른다. 두 가지 이상의 원운동이 합해져 행성의 진행방향이나 속도가 변화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행성의 접근에 의한 밝기 변화, 순행과 영행의 속도차이를 대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각각의 행성들을 관측해 보면, 이들은 항성들을 배경으로 동쪽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일 년에 한 번 정도 각각 다른 시기에 잠시 정지했다가, 몇 주 동안 서쪽으로 움직인다. 이런 현상을 ‘역행 운동’이라 부른다. 서기 15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런 역행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모델을 제시했다. 그의 모델은 두 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원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모원’이다. 작은 원은 모원에 의해 운반되는 ‘주전원’이다. 행성은 주전원을 따라 돈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이 두 원운동을 결합함에 따라 행성이 모원 속으로 들어가 지구에 가장 가까웠을 때,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에 따르면, 태양은 원궤도를 따라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 원의 중심은 지구의 중심과 일치하지 않았다. 그 원은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약 3.5 퍼센트 정도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 놓여 있는 이심원이었다. 그는 태양이 이 이심원 궤도를 일 년에 한 번 회전하며, 이심원 궤도 자체가 지구 둘레를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이심원 궤도는 별들에 대하여 고정된 상태로 있으며, 태양의 이심원 궤도, 행성들의 궤도가 지구에 대하여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 것이다.

13세기 초, 영국의 천문학자 존 오브 할리우드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라틴어식 이름인 요하네스 시크로보스코라는 필명으로 ‘천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은 기본 교재로서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행성들의 운동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 그래서 다음 세대인 13세기 중엽이 되자 좀더 발전된 교재인 캄파누스가 쓴 ‘행성의 도구’가 등장했다. 이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간단한 역학적 방법으로 설명해 놓았다.

14세기 우마이야 왕조의 다마스쿠스에 있던 이븐 알 샤티르(Ibn Al Shatir)는 천동설의 입장에서 동시심을 제거하여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체계를 생각했다. 원운동에서 직선왕복운동을 일으키는 방법은 그에 앞서 13세기의 나시르 알 딘 알 투시(Nasir al-din al-Tusi)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들의 업적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지적되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기록은 없다.

15세기 중엽 비엔나 대학의 게오르그 푸르바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의 도구‘를 새롭게 해석해 새로운 책 ’새로운 행성 이름‘을 썼다. 그는 투명한 수정으로 된 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모원과 주전원을 만들어 보려 했다. 즉, 우주의 구성과 운동을 실제 물질을 사용해 주체적으로 표현해 보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