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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일생

출생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2월 19일, 폴란드 토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토룬은 폴란드의 번창한 도시로 발트해에서 약 15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1470년대 토룬의 인구는 약 만 명이었고 많은 상인들과 공장주들이 이곳에서 외국과 무역을 했다. 1200년대 프로이센의 영토로 이교도인 슬라브인의 땅이었던 토룬은 동유럽의 게르만 기사단에게 정복당한 후 기독교로 개종되어 약 200년 간 기독교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1400년대 초, 폴란드의 지도자들이 이에 반발하여 게르만 기사단과 전투를 벌였고 토룬은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니콜라우스의 아버지는 정치적 활동도 활발하여 그 후에 벌어진 또 한 번의 전투에서 토룬의 다른 상인들과 연합해 폴란드 왕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어머니인 바바라 바첸로데 또한 토룬에서 유명한 상인의 딸이었다. 니콜라우스라는 이름의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소년 시절에는 니클라스로 불리다가 크라쿠프의 대학에 가게 되면서 라틴어 철자법에 따라 니콜라우스가 된 것으로 보인다.

어린시절
코페르니쿠스의 아버지는 그가 열 살 때 죽었다. 그의 큰누나는 수녀가 되었고, 작은 누나는 상인과 결혼했다. 코페르니쿠스 형제는 대학에 다닐 수 있을 지가 불확실해졌지만 외삼촌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당시 서른 여섯 살이었던 외삼촌 루카스 바첸로데는 두 개의 가톨릭 교구 운영 위원회 위원이었다. 운영 위원회는 참사회라고도 불렸는데 각 교구의 경제적인 업무를 맡고 있었다. 바첸로데는 먼저 코페르니쿠스 형제를 자신이 졸업한 세인트 존스 스쿨에 보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학교에서 라틴어를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추고 기본 산술 등을 배웠다. 그 후 형제는 무슨 가톨릭 학교에 입학했다. 토룬의 비스툴라 강 상류에 위치한 이 학교는 폴란드의 수도인 크라쿠프에 위치한 크라쿠프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준비단계였다

대학시절
크라쿠프 대학은 야기옐론 대학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야기옐론 왕조는 게르만 기사단의 침입을 막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대국을 건설했으며 16세기에 정치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던 강력한 왕조였다. 이 왕조의 왕들은 정치적으로 강건했을 뿐 아니라 예술과 과학 분야를 지원해 폴란드의 문화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전통 문화와 맞먹을 정도가 되게 했다. 특히 크라쿠프 대학의 천문학 연구는 북유럽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Nicolaus Nicolai de Thuronia라는 이름으로 1491-1492년 겨울 학기에 크라쿠프 대학에 등록했다. 당시 유럽의 대학의 교육 과정은 대부분 비슷했다. 학생들은 신부, 의사, 법률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십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하면, 우선 4년 동안 일반적인 학문과 예술을 공부했다. 그 후 일부 학생들은 신학, 의학, 법률 중에서 한 분야를 택해 여러 해 동안 더 공부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예술 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강의는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많은 과목들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책들과 함께 이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우주 전체를 밀접한 논리적 관계로 묶어 하나의 체계로 설명하고자했다. 그는 자연의 모든 사물은 흙, 물, 공기 불이라는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하늘은 완벽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으면 하늘의 별과 태양, 행성들은 제 5원소인 에테르로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했다. 신은 우주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우주가 그 질서에 따라 움직이도록 관리한다. 인간은 물질적 요소와 영적인 요소가 섞여 이루어진 존재로 생각되었다. 유럽의 교수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분석하고 해설을 달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해설서들을 공부하고, 동료들과 토론하며 후에 펼칠 자신의 사상의 밑거름을 쌓아갔다. 학생들은 또한 수학, 천문학, 유클리드 기하학 등을 공부해야 했다. 교재로는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과 사크로보스코의 <천구>가 쓰였다. 유클리드는 기원전 300년 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수학자로 그가 저술한 <기하학 원론>은 그의 연구와 더불어 그 이전의 수학자들의 연구를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은 1900년대 초까지 기하학 교재로 사용되었다. <천구>는 1200년대 초에 영국의 수학자 사크로보스코가 쓴 책으로 하늘과 지구의 형태나 사계절의 변화 등을 설명하고 있다. 대학에서 코페르니쿠스는 다양한 천문학적 지식을 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원 우주 이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심, 주전원의 개념은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부분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후에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새로운 우주 체계를 제시하는 바탕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오마이오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행성 이론을 수정한 많은 학자들의 책을 공부했다. 게오르그 푸르바흐는 1450년대에 비엔나에서 <새로운 행성 이론>이란 책을 쓴 학자로 그의 책에는 프톨레오마이오스의 옛 모델을 수정한 내용이 담겨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푸르바흐가 만든 일식과 월식의 시간, 위도 등을 담은 표를 베끼거나 다른 여타 표들을 정리하는 등 천문학적 관심을 높여갔다

계속되는 배움
코페르니쿠스는 크라쿠프 대학의 예술 과정에서 4년간 공부한 뒤 학위를 받지 않고 1495년 가을, 대학을 떠났다. 그의 외삼촌 바첸로데는 1489년에 바르미아의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실상 그곳을 다스리는 통치자였다. 1495년 코페르니쿠스가 외삼촌을 만나기 위해 프롬보르크에 도착했을 때, 바르미아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 위원 중 한 명이 사망했다. 바첸로데는 그 자리에 니콜라우스를 임명하려 했다. 바티칸의 허락을 받은 뒤, 코페르니쿠스는 그 해 여름 참사회 회원이 되었다. 다음 해, 바첸로데의 뒤를 이어 성직자가 되기 위해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모든 자금은 바첸로데가 지원했다. 코페르니쿠스가 공부한 교회법은 판사의 권한, 판결을 내리는 과정과 규정, 성직자들이 성사를 행하고 재산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권리와 의무, 결혼에 대한 모든 법률과 규정, 여러 범법 행위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해 교회의 운영과 관련시켜 내린 판결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성직자들에게는 일반적인 법이 아닌 교회법이 적용되었다. 볼로냐에서 공부하던 무렵, 코페르니쿠스는 참사회 회원으로서의 권리를 입증하는 공증서를 받은 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다시 천문학에 몰두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1497년 초, 코페르니쿠스는 도메니초 마리아 다 노바라는 볼로냐 대학의 천문학 교수의 집에서 하숙했다. 그는 노바라의 천문학 관측을 도우면서 천문학적 지식을 넓혀갔다. 또한, 그는 레기오몬타누스의 <알마게스트의 발췌본>을 공부했다. 1500년 여름,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 대학에서 4년 동안의 법률 공부를 마치고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와, 1501년 6월 말, 그는 프롬보르크에서 열린 바르미아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로부터 2년 동안 더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1501년 10월, 코페르니쿠스는 파도바 대학의 의학 과정에 등록했다. 대학의 의학 강의는 2세기 무렵 로마의 의학자인 갈레노스의 저술을 바탕으로 했다. 2년 동안의 학업이 끝나고 1503년 5월 31일, 코페르니쿠스는 볼로냐에서 멀지 않은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